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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 유래

호계3동

지명유래 · 전설 > 구군포(舊軍浦)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 천 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 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 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 란 지명이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 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國幸定例>>(1789) 道路橋梁條에 <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軍浦는 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國役 을 말하기도 하고, 正兵을 돕는 助丁에게 役을 면해주는 대가로 받는 삼 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 유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軍浦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官軍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僧侶義兵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軍飽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軍浦로 되었으며, 軍飽가 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주민센터, 호계지구대,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지구대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軍雄山에서 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 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지구대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