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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朴遾), 1602~165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열 살 때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이항복을 스승으로 학문을 배웠습니다. 인조 8년(16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병조, 사헌부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를 지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전장에 나가 장수들을 후원하였습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인조 25년(1647년) 천추사로 연경을 다녀와 도승지가 되었습니다. 인조임금이 돌아가신 후 효종 1년(1650년)에는 공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후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서 쉬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하여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으며 1665년 묘 아래 신도비(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비석)가 세워졌습니다.

원태우(元泰祐), 1882 ~ 1950

독립운동가로 만안구 안양1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었지만 바른 일에 앞장서는 의로운 정신과 기백이 있었습니다. 원태우 지사는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을사늑약의 장본인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수원을 구경하고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죽이기 위해 안양 육교 아래 철로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같이 돌무더기를 쌓았던 동료가 돌을 치워버리는 바람에 열차는 전복을 면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원지사는 열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 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원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철도방해죄 명목으로 징역 2개월과 곤장 1백 대에 처해 수감되었습니다. 이듬해 1월 24일 석방되었으나 감옥 생활 중의 모진 고문으로 온몸에 흉터 자국이 나서 한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자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석공으로 생계를 꾸려 가다가 동안구 수푸루지(비산동)에서 1950년 한국 전쟁중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흥이(韓興履), 1897 ~ 1979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서 태어나 1915년에 시흥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후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교) 2학년 때(1919) 3.1 독립운동 시, 시흥, 안양, 군포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3.5학생독립운동에서는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1927년 일본학사 시찰단으로 일본의 여러 곳을 보고 느낀 그는 우리 경제의 낙후성과 현재의 학교 교육이 일본인 양성정책이라는 판단으로 귀국 후, 경성법정학교 야간부로 입학하였고, 1928년 경성매일신문사에 입사했으나, 강직한 기사로 인해 타의로 신문사를 그만두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공장이 파괴되자, 지금의 부천시에'안양직물주식회사'를 설립, 국가 경제 부흥과 기술자 양성에 뜻을 두고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 이사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이후 1979년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을 세웠으며, 1979년 5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0년 8월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추서 받았고,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번지에 있으며, 동안구 갈산동 자유공원에 기념비가 있습니다.[안양직물주식회사]

이재천(李在天) 1913 ~ ?

경기도 시흥 동면( 현 석수동 부근)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지도하에 청소년의 독립 정신계몽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화랑사]에 입단하여 독립운동 연락업무 등의 활동과 임시정부의 기관지인[화랑보]를 발행하여 교포에게 배포하였습니다. 상해 한국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하여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이후 행방불명되었으나 고문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수감생활을 할 수 없어 석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화랑보] [화랑사]

이재현(李在賢), 1917 ~ 1997

광복군으로 경기도 시흥 동면(현 석수동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강점기인 1939년 10월 중국 중경에서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공작대를 조직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는데, 한국청년[전지공작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 명의 대원과 함께 과감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후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제5 지대로 편입되어 총사령부를 호위하며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와 정보활동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하였습니다.[전지공작대]

최경환(崔京煥), 1805 ~ 1839

성인(聖人)이며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살다가 정착한 곳이 안양9동 후두미동(병목안)이었습니다. 부인 이성례와 담배를 경작하며 담배촌에서 천주교 교우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1839년 7월 31일 기해사옥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모진 형벌로 1839년 9월 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버리라는 회유를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1930년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양화진 성당으로 옮겨져서 모셔졌습니다. 그래서 담배촌 성역지(안양9동 병목안)에는 봉분과 기념비만이 남아있습니다. 1984년 5월 6일, 순교 145년이 지나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 200주년 신앙대회 때 교황 요한 바오르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오긍선(吳兢善), 1878 ~ 1963

의학자이며 사회사업가입니다. 1905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대에 입학하여 피부비뇨기과를 전공하였으며 졸업과 동시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12년 세브란스 의전의 첫 한국인 교직원이 되었으며 부교장까지 지냈습니다. 1919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경성보육원을 설립하였으며, 이 보육원을 1930년대에 만안구 안양2동으로 옮기면서 1954년 기독보육원으로 원명을 바꾸었습니다. 기독보육원은 1998년 3월 해관보육원으로 원명을 바꾸었다가 2007년 좋은 집으로 원명을 바꾼 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긍선은 양로와 고아 사업을 펼치며 사회의 지도자로서 한국 근대화를 위해 줄기찬 노력을 기울인 공로로 1962년 제6회 소파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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