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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안양을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 유적이 큰 하천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한강에 인접해 있는 안양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989년 평촌 지역의 유물조사에서 후기 구석기에 속하는 석기가 많이 발견되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신석기 시대
안양을 비롯하여 한강 유역 주변의 도시들은 약 7천 년 전부터 신석기인들이 살았습니다. 중서부지방에서는 신석기 유적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의 도서 지방에 집중적으로 발견됩니다. 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사람들은 서해안으로 점차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안양은 한강에서 서해안으로 이동하는 교통로에 있으므로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안양에서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고인돌(지석묘)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평촌 신도시 조성을 위해 1989년과 1990년 평촌 지역을 조사할 때 15기의 지석묘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5기가 갈산동 자유공원에 이전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2000~2002년에 발굴된 청동기 시대 주거지는 안양시와 경기 중부지방의 청동기시대 주거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그중 2기를 이전복원하여 관양동 청동기 유적지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부족국가 시대
부족국가 시대의 안양은 마한에 소속된 부족 국가였습니다.[후한서]에 따르면 마한에 속해 있던 부족국가는 모두 54개국에 이르며 안양이 속해 있는 부족국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삼국시대
안양은 삼국시대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지배를 받았고, 5세기 때에는 고구려의 남하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라 진흥왕의 활약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 시대의 안양은 주로 지방의 유력한 세력가에 의해 지배가 되었습니다. 안양을 포함한 시흥의 유력한 세력가는 강감찬 가문이 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의 침입을 귀주에서 막은 장군입니다.
고려 시대
후삼국 시대에 곡양현이었던 안양은 왕건이 고려를 세우며 고려 초에 금주현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조선 후기까지의 안양 지역은 석수동과 박달동의 안양리를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안양 지역은 시흥군 군내면과 과천군 상, 하서면 일대를 모체로 삼고 있습니다.
연도 | 내용 |
---|---|
475(고구려 장수왕) | 율목군(박달,석수지역 - 잉벌노현) |
757(신라 경덕왕) | 율진군 곡양현 |
900(신라 효공왕) | 왕건에 의해 "안양사" 창건, 안양 명칭 등장 |
940(고려 태조) | 과주 - 금주현 |
990~994(고려 성종) | 과주- 부림, 금주 - 시흥 |
1413(조선 태종) | 과천현(금천) |
1416(조선 태종) | 금양현 |
1795(조선 정조) | 시흥현 |
1895(조선 고종) | 과천군-시흥현(시흥군) |
1914. 3. 1 | 시흥군 서이면[박달, 석수지역은 서면, 동면] |
1941. 10. 1 | 안양면으로 개칭 |
1949. 8. 15 | 대통령령 제162호 안양면에서 안양읍으로 승격 |
1963.1.1 | 동면 신안양리, 서면 박달 리가 안양읍에 편입 |
1973. 7. 1 | 법률 제2597호 안양읍이 시로 승격 |
1989. 5. 1 | 시 조례 제931호로 출장소(만안,동안)설치 |
1992. 10. 1 | 구 설치조례에 의거 만안구, 동안구 승격 |
1996. 11. 15 | 시청사 준공 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