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복지센터
지명유래·전설
석수2동은 조선 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1795) 음력 윤 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 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2리. 3리(新安養2里.3里)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 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고, 1979년 4월 28일 시 조례 제340호에 따라 석수1동은 분동해 충훈부(忠勳府), 꽃챙이(花倉洞) 등의 제 지역을 석수2동(石水二洞)이라 하였으며,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에 따라 광명시 소하1동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1일 시 조례 제931호에 따라 만안출장소에 편제된 후, 1990년 1월 1일 시 조례 제1000호에 의거 충훈부 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分洞)해 석수2동에서 분리되었고, 이어 1992년 10월 1일 내무부 승인 제892호에 따라 만안구로 편제되었다.
석수2동의 변천일람
-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 잉벌노현(仍伐奴縣)
- 신라 경덕왕 34년(757) : 곡양현(穀壤縣)
- 고려 태조 23년(940) : 금주현(衿州縣)
- 조선 태종 13년(1413) : 금천현(衿川縣)
- 조선 태종 14년(1414) : 금양현(衿陽縣)
- 조선 태종 34년(1434) : 금천현(衿川縣)
- 정조 13년(1795)음(윤) 2. 11 :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
- 고종 32년(1895) 5.26 : 시흥군(始興郡) 군내면(君內面) 안양리(安養里)
- 1914. 3. 1. :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
- 1963. 1. 1. : 시흥군(始興郡)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
- 1964. 1. 1. : 시흥군(始興郡) 안양읍(安養邑) 신안양2리(新安養二里)
- 1973. 7. 1. :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
- 1979. 4. 28. : 안양시(安養市) 석수2동(石水二洞)
- 1987. 1. 1. : 대통령령 제12007호에 의거 광명시 소하1동 일부 지역 편입
- 1989. 5. 1. : 만안출장소(萬安出張所)에 편제
- 1990. 1. 1. : 시 조례 1000호에 의거 충훈부 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
- 1992. 10. 1. : 만안구(萬安區)에 편제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 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안양 육교는 1905년 을사늑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 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 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다.
우리동의 명칭 유래
-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싸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개설된 수영장을 石水洞水泳場 이라고 하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석공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관악산 계곡의 큰 바위와 맑고 깨끗한 물을 연상시켜주는 좋은 이름입니다.
자연마을 명칭 유래
현재의 석수 2동 지역에는 과거 꽃챙이(화창), 연현, 신촌, 벌터라는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신촌과 벌터는 잘 쓰이지 않지만, 화창, 연현 마을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쓰이고 있습니다.
충훈부 동북쪽에 있다. 이곳은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와 철쭉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 출신 성만제(成萬濟)(1890~1959,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에 묘가 있음)씨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후 벚나무 등을 식재하면서 각종 꽃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꽃챙이(化倉洞)이라 칭하고 있다. 그런데《조선지지자료》 경기도 시흥군편에 곶창(串昌)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 일대가 안양천변에 위치한 곶(串, 바다에 뾰족하게 내민 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내에는 효종 때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판서를 역임한 박서(朴?)(3402~3453)와 일제강점기 만석꾼으로 자본가였던 김윤식(金潤植)의 묘가 있다.
현재 석수 전철역 주변에 있는 마을로 1950년대만 해도 농경지였으나 태양당인쇄, 삼흥유지 등 공장과 석수 전철역이 생기면서 인구가 급증한 지역입니다.
동아제약(현재 LG빌리지) 입구의 안양 육교 부근이 예전에는 험준한 고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鳶峴(솔개연, 고개현)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관악역(冠岳驛) 서쪽으로, 만안로(萬安路) 노변(路邊) 옆에 있는 마을.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대부분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新村」이라 칭했다. 이곳은 1956년 7월에 수도영화주식회사(首都映畵株式會社)에 따라 대규모 촬영소인「안양촬영소」(대지 2만2천여 평)를 건설하여 한국의「할리우드」로 불랄 만큼 한때는 한국 영화의「메카」(Mecca)였었다. 천연광선이 충분하고 우량(雨量)이 적은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이곳을 적지(適地)로 택하게 된 것이다. 신촌마을은 1956년 수도영화주식회사가 설치된 후, 안양예고 등의 교육기관과 1974년 관악전철역이 건설되자 관악아파트, 무림아파트, 산정연립 등이 건립되어 급격한 성장 추세를 보였다. 이곳에는 안양문화의 상징인 만안교(萬安橋)가 1980년대에 이전, 복원되었다.
충훈부 북쪽에 위치했던 마을. 서쪽으로는 광명시 일직동 자경리와, 북쪽으로는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동쪽으로는 꽃챙이 마을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허허 벌판 모래땅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벌터」라 불렀는데, 일명「벌말」(坪村)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일제강점기 때는 밤의 명산지라 하여「밤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진주 하씨로 알려졌다. 석수1동 삼막골에 살던 진주 하씨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후손들이 이곳으로 분가를 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5호 남짓했던 이 마을은 林씨가 1호, 李씨가 1호이고 그 외는 모두 진주 하씨였었다.
벌터마을은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우물을 파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 우물을 파지 않고 식수는 안양천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엽에 죽어도 함께 죽자는 일념으로 마을 중앙에 우물을 파기 시작하자 집마다 우물을 팠다고 한다.
1960년대 초에 럭키아파트 일대에 있던 경기도립종축장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마을이 폐동되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우물을 파지 말아야 하는데 지신(地神)이 노해서 마을이 망했다는 말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립종축장은 이곳에 10여 년간 있었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리 산 26-1로 이전하였고, 그 후 모 재단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개인에게 불하여 현재는 황량한 벌판으로 있다.
폐동전만 해도 벌터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과 무해 및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냈다.
동아제약 입구에 있는 안양육교(安養陸橋) 부근이 원래는 높은 고개였는데, 구 한말에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고개를 평탄화하였다. 현재는 솔개고개(鳶峴)라 칭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곳 일대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졌을 뿐만 아니라 으슥한 곳이라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褓負商), 행인(行人) 등이 한양을 가자면 반드시 이 고개를 거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의례 산적과 강도의 습격을 받아 빈털터리가 되곤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연현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이곳이 농경지여서 참외, 수박 등 청과물을 이들 산적과 강도가 떼를 지어 서리를 해가는 바람에 농민들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시흥(금천) 현령이 골머리를 앓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부터 산적과 강도가 참외, 수박 등을 서리해 가는 곳이라 하여 「서리재고개」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양을 대표하는 국가유산 중 하나로 조선 후기의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이 다리의 축조는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正祖)(1776~1800)의 명에 의해 축조되었다.
정조는 영조(英祖)(3494~1776)의 왕세손으로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는 영조의 왕세자이었으나 부왕인 영조에 의해 영조 38년 (1762) 윤 5월 13일 왕세자의 지위에서 폐출되어, 뒤주 속에 갇힌지 8일째 되는 동년 윤 5월 21일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정조의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제(弘濟)로 영조 35년 (1759)에 세손에 책봉된 후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1719~1728)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영조 51년(1775)에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다스리다가 영조가 죽자 25세에 왕위에 오른 후 부왕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1899년에 장조(莊組)로 추존)이라 추상하고 양주 배봉산에 있는 그의 묘소인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봉(封)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매년 한 두 차례씩 영우원을 전배하고 국내(局內)를 두루 살피곤 했으나, 영우원의 원침형국(園寢形局)이 천협(淺狹)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명당으로 천장할 계획으로 연운(年運). 산운(山運). 본명운(本命運) 등을 살펴 길년(吉年)인 정조 13년(1789)에 천장할 것을 연교(筵敎)하고, 지사(地師)를 각지(各地)로 보내어 명당을 살피도록 명한데 이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정조의 친누이 동생 화평(和平) 옹주 남편)이「영우원은 원침의 형국이 좁고 또 불길한 듯하오니 다른 곳으로 천봉(遷奉)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대신(大臣). 각신(閣臣). 예당(禮堂) 등 2품 이상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초견(初見)하고 영우원 천봉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홍제동의 영능(寧陵).건원능(建元陵).우강(右岡)의 원능(元陵)과 더불어 수원의 화산(花山)이 3대 명당으로 꼽히게 되었는데, 그중 수원의 화산은 영능의궤(寧陵儀軌)에 실려 있는데, 천년에 한 번 만나볼까 말까한 길지로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이어서 정조도 이곳을 천봉지로 의중을 굳히고 승지로 하여금 水原山論을 낭독게 하자 여러 신하가 모두 찬동하여 천봉지를 수원 화산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 7월에 산역(山役)이 시작되자 8월에는 원호(園號)를 현융(顯隆)으로 결정한 데 이어 10월 7일에는 현륭원의 천봉례(遷奉禮)를 거행하였으며 10월 17일에 마무리 산역이 있었다.
이 후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춘행(春幸)과 추행(秋幸)의 두 행차가 있었는데, 춘행은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거행되었으며, 추행은 8월 삭망 사이에 거행되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춘행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는 사도세자(장헌세자)의 탄신일이 1월 21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강민(江民)과 농민의 한가한 시기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폐해를 최소한에 그치게 하려는 정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만안교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행차 뒤에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여서 얼음이 풀릴 때나 장마가 질 때면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이 많았는데, 시흥로의 개설과 정조의 능행으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축조케 된 것이다.
만안교는 경기관찰사인 서유방(徐有坊)(1741~1798)이 정조의 명을 받고 정조 19년(1795) 7월에 착수하여 3개월 만인 동년 9월에 완공을 보았다. 이처럼 다리가 빨리 완공을 보게 된 것은 경기관찰사가 직접 지휘한 탓도 있었겠지만 만안교 부근의 하천가에 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안교 길이가 15장, 폭은 4장, 높이는 3장에 갑문(閘門)(다리 구멍을 뜻함), 7개(사적비에는 5개로 기록)의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조는 준공 후 감독한 사람과 공장(工匠)에게 상을 내림은 물론 만안교란(萬安橋) 교명(嬌名)도 직접 명명했는데, 만안교는 「성가(聖駕)(임금이 탄 수레 즉 정조)와 자가(慈駕)(혜경궁홍씨)가 육용(六龍)에 멍에를 메이고 방울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났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만년을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처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만만년토록 성은(聖恩)을 입게 되고 자덕(慈德)을 기리게 되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만안교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함께 건너면서부터인데, 이때는 만안교가 축조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나무로 임시 가설했다가 행차를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세자인 사도세자와 함께 영조 11년(1735)에 탄생하여 34세 때〈영조 20년(1744)〉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2남 2녀를 두었으나 28세 때(1762) 세자가 살해된 뒤 어린 3남매(큰아들은 요절)를 거느리고 홀몸이 되었다. 시아버지인 영조와 남편인 세자의 괴벽 틈에서 끝내는 당쟁의 소용돌이로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는 것을 살아서 지켜보아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인간상황은 그가《한중록》에서 썼듯이「눈물이 말라 슬프면 눈이 아플지경」으로 처절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42세 때인 1776년 둘째 아들 산(?)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1795년 윤 2월 13일이 회갑일(回甲日)이 되어 세자의 원침이 있는 수원에서 회갑연을 거행키 위해 그해 음력 윤 2월 9일 원행길에 올랐다. 왕궁을 출발한 정조는 용양봉자정에서 잠시 쉰 후 시흥행궁에서 경숙(經宿)하고 다음날 시흥행궁을 출발하여 만안교를 처음으로 건넜는데, 이후부터 만안교란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안교는 본래 안양대교에서 동쪽으로 안양유원지 길을 따라가다 만안로와 서로 만나는 十자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약 20m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구 한말에 이르러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안양천을 남쪽으로 우회한 후부터 다리로서의 효용 가치는 상실되어, 다리의 위와 아래 지역에 공장과 민가가 들어섰는가 하면 한때는 다리 밑은 넝마주이 등의 안식처(?)이기도 했으며, 광복 후 국도 1호선에 포장을 실시하면서 다리 위에 콜타를 부어 만안교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만안교는 1973년 7월 10일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1980년 국도확장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