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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체육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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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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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있으며, 지주는 85cm의 간격을 두고 동, 서(東西)로 세워져있다. 높이는 약 3.8m에 특별한 조각이 없이 상부(上部)에 약간의 가공(加工)이 있어 고식적(古式的)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할 수 있도록 조성된 돌 지주로 당간의 끝에는 불기(佛旗)가 묶여져 있다. 따라서 당간은 깃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두 개의 돌지주는 깃대기둥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을 중초사지(中初寺址)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刻字)한 명문(銘文)에 의한 것이다. 명문에는 신라 흥덕왕 (興德王) 원년(元年)인 826년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다음해인 흥덕왕 2년(827) 2월 30일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어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명(寺名)과 조성시기, 참여자 명단 등이 있는 당간지주이다.


  • 보물 제4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12-1
만안교(萬安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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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朝鮮) 정조(正祖)(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朝鮮)후기(後期)의 대표적인 홍예석교 (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였다..그러나 과천의 노정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참여한 김상로의 형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 수원의 새로운 행로를 만들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이 다리는 처음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수 있도록 하였으나 1795년(정조19)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끝에 돌다리를 완성하였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 31.2m 너비 8m이다. 결구방법은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세로로 밀접하여 홍예를 형성하였으며 또 10여개의 장방석으로 둥글게 테를 이룬 높이 6m인 7개의 갑문을 축조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國道)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38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679 (하천)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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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동 마애종은 거대한 바위에 스님이 종을 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애종이다. 마애종의 형태는 건물의 들보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이며 음통(音筒)과 정교한 용뉴(龍紐) 아래로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종의 높이는 1.23m이고 종신은 1m이며 하대폭은 84cm이다. 종신의 표면에는 유곽(乳廓)과 함께 타종 부분인 연화문(蓮華紋)의 당좌(撞座)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매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안정적인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종은 조각수법과 종뉴, 종신의 표현을 볼 때 신라말 내지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2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 32 (비산공원 주차장 뒤)
안양사 귀부(安養寺 龜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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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 귀부는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龜趺)만이 남아 있다. 몇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地臺)를 구축했고, 굄대와 귀부는 한 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비좌(碑座)는 각면을 외겹 연꽃무늬로 돌리고 있다. 귀부에 조성된 귀갑문(龜甲文)은 6각형에 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새겨 사실적이고 뒤편에 꼬리는 옆으로 새겼다. 높이 1m, 길이 3m, 너비는 2.18m로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판단된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3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 27번지
삼막사 마애삼존불(三幕寺 磨崖三尊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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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경내에 있는 마애삼존불은 자연암벽에 부조(浮彫)되어 있다. 암벽 감실은 높이 1.7m에 너비 2.1m 깊이 7cm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이며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중후하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좌우(左右) 협시보살은 일광(日光)과 월광보살(月光菩薩)로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浮彫)로 생동감이 넘쳐 나며 조선시대 불상(佛像)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이 평판적이고 경직된 상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 아래에는 건륭(乾隆) 28년(영조 39년, 1763)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후기 불교조각사 연구(佛敎彫刻史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칠성신앙(七星信仰)과 다산신앙(多産信仰)이 결합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4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산10-1 (삼막사경내)
삼막사 3층석탑(三幕寺 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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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3층 석탑은 삼막사 승도(僧徒)인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蒙古軍)의 원수(元帥) 살리타이를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쏘아 죽인 후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탑으로 일명 살리탑이라 전하기도 한다. 탑의 높이는 2.55m이며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1석으로 만들어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12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41-54
삼막사 사적비(三幕寺 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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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地臺石)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 경기 관악산맥 갑묘행룡 삼성산하 사명삼막좌유향로봉(朝鮮國京圻冠岳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寺名三幕左有香爐峰)"과 건립연대(建立年代)를 밝히는 "강희(腔熙) 46년(四六年) 정해(丁亥)"란 명문(銘文)이 있어 이 비석(碑石)의 위치는 경기 관악 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준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41-54
유영수양관 연명지도(留營首陽館延命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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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수양관은 황해도의 감영으로 오음 윤두수(1523-1601)가 선조 14년인 1581년 6월, 연안부사로 재직시 10년전인 1571년(선조 4년)의 황해도 관찰사 시절을 회상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다. 우측에 칠언시 56자와 끝에 오음(梧陰)이란 인장 및 수행 영사(營使)의 이름, 직명을 표시하고 이후 6대손과 8대손, 9대손 등이 선대의 공덕을 기리며 그림의 유래와 사실을 기록하여 연명지도로 완성케 된다. 2매 대련으로 당시 황해도 감영의 전경과 화풍을 알 수가 있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49호
  • 소재지 : 동안구 부흥동 (개인소장)
군호재가문서(軍號裁可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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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호는 병조에서 야경순시에 쓰이는 암호로 건륭59년(乾隆五九年) (정조18년, 1794) 5월 3일의 군호를 당시병조의 시랑인 윤장열이 입직근무자로 대전의 재가를 받고자「長養」이란 두글자를 올리자 왕세자 순조께서 수결과 함께 「太平」이란 두글자와 함께 「可」 자로 재가하니 당시 순조의 나이는 5세이었다. 문서면에는 병조의 인장 7개와 한곳에「尹」이란 담당자의 성과 또 다른 인장에는 이름의 첫자인「長」자의 아래4획을 뺀 서명이 적혀있어 조선시대 야경시 군호의 양식과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50호
  • 소재지 : 동안구 부흥동 (개인소장)
중초사지 삼층석탑(中初寺址 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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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지면에 두꺼운 지대석(地臺 石)이 놓이고 그 위에 2단의 별석(別石)이 놓여 상층기단을 받치게 된 단층기단 (單層其壇)으로 되어 있다. 기단 중석은 4매석으로 짰는데, 우주 (隅柱) 모양이 있을 뿐 탱주(撑柱)는 없고 갑석(甲石)은 2매판석(二枚板石)으로 덮였는데, 위의 괴임은 1단이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돌이고 탑신은 지나치게 작은 초층탑신석만 남았고 옥개석은 두꺼우며 밑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없어졌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64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212-1
박서 신도비(朴?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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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는 종2품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로서 박서(1602 ~ 1653)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황해도 관찰사 병조참판, 공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 신도비는 환경사업소 입구 은기목장에 있으며 신도비로부터 북쪽 20m 지점에 박서묘가 있다. 총고는 3.82m이며 비는 1665년에 만들어졌다.


  • 비지정 유형 문화재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168
삼막사 삼귀자(三幕寺 三龜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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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 1852 ~ 1935)이 이곳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자를 새겨 놓았다. 삼귀자 좌측엔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어 1920년에 쓴 것이며 서체는 전서(篆書)로 우측에는 「관음몽수장수영자」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가 있다.


  • 비지정 유형 문화재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10-1
생칠장(生漆匠,옻칠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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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칠이란 옻칠을 말하며 옻나무액의 수액을 원료로 채취한 생칠을 기물(器物)에 칠하여 수분이 증발될 때 반투명의 초청 빛깔이 나게 하는 색칠기법으로 은은한 색과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우수한 칠기공예(漆器工藝)이다. 우리나라 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발견이 되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나전칠기가 매우 발달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칠기제품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기능보유자 송복남(1936년생)선생은 13세 부터 옻칠을 시작하여 서울시 중요무형문화재 1호인 故 홍순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전국 주요사찰의 불상과 강연단상등에 옻칠작업을 하였다. 현재의 주 옻칠 공예품은 소반과 목제식기류, 좌대등 전통공예품이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17호(송복남)
  • 소재지 : 동안구 부림동 부영APT 309동 1508호
악기장(樂器匠, 북메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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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메우기란 가죽을 이용해 북을 만드는 기술로 예전에는 이를 고장(鼓匠)이라 불렀으며 고대 사회부터 제사와 주술용, 경고와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리듬과 선율 악기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북 제작의 일반적인 과정은 가죽무드질과 북통짜기 피씌우기, 고리달기, 북줄메기, 소리잡기, 칠과단청의 순서로 진행되며 조선조에는 신문고(申聞鼓)라 불리는 대형북을 의금부 당직청에 달아 민의상달의 제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임선빈(1950년생) 기능보유자는 36년간의 북만들기 장인으로 일찍이 북공예의 대가 황용옥, 박일오, 박균석 선생에게 북공예 기술을 사사받았다. 대형북 공예가로 이름이 높으며 1997년에는 "안양시민의 소리북"(북통길이 220㎝, 울림판 240㎝)을 제작하여 안양시에 기증함으로 우리시의 문화적 위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30호(임선빈)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104-157
평양검무(平壤劍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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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란 신라의 화랑 황창랑이 백제의 왕을 시해 하려고 칼춤을 춘것이 그 시초라 하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엔 궁중과 지방관아의 향연에 반드시 등장하는 춤으로 꼽혀왔다. 또한 각 지방마다 전승되는 동안 향토색을 띤 검무가 발달하여 이북 지역의 평양검무와 해주검무 및 서울검무, 경남의 진주와 통영검무, 그리고 호남검무등이 있다. 이봉애(1923년생)여사는 고향인 평양의 서문여고 재학때 당시 대동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던 故 김학선 선생에게 승무와 검무를 전수받고 월남후엔 안양에 정착, 현재 평양검무 보존회장으로 있으며,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및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로상과 금상을 수상하는등 평양검무의 보존과 전승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평안남도 무형 문화재 제1호(이봉애)
  • 소재지 : 만안구 석수2동 259-27
방자유기(方字鍮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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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유기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평균 78:22의 비율로 섞여진 놋쇠를 두둘겨, 그 늘어나는 성질을 이용해 그릇 등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유기의 제작기술은 순천의 반방자유기, 안성의 주물유기 평안북도 납청의 방자유기등이 있어 중요 무형문화재로 보호 전승하고 있다. 놋쇠의 가장 큰 특징은 인체에 무해한 점을 꼽을 수 있어 예로부터 유기의 값이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수저나 식기류는 반드시 놋쇠를 사용하였다. 기능장 이형근(1958년생)씨는 중요무형문화재 77호. 방자유기장 이봉주옹의 자제로 15세부터 유기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79년 전국공예품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부친인 이봉주옹을 도와 94년도엔 세계최대의 크기로 알려진 대징(지름 161㎝, 무게 98㎏)을 제작, 우수한 방자유기의 제작기술을 세계인에게 홍보 하였다.


  • 중요 무형 문화재 77호 전수조교(이형근)
  • 소재지 : 만안구 박달동 617-20
비산동 도요지(飛山洞 陶窯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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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지는 관악산(冠岳山) 일대에 형성되었던 요지군(窯址群) 중의 하나로 11-14세기에 걸쳐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는 11세기경의 조질청자류(粗質靑磁類)와 11-12세기경의 조질철채도기(粗質鐵彩陶器), 흑유도기(黑釉陶器), 14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청자류와 더불어 역시 14세기의 고려백자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도자기의 다양한 발달상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청자류는 대체로 지방적인 성격의 질이 낮은 제품들로 대접, 접시, 각접시, 항아리등이 있으며 순청자가 대부분이나 음각문(陰刻文), 반양각문(半刻文), 상감문(象嵌文)을 가진 것도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고려백자로, 용인서리요지(龍仁西里窯址)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며, 고려후기 백자의 양상과 조선백자의 성립과정을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백자는 연질(軟質)과 경질(硬質)의 두 종류가 있고, 상감과 음각문이 베풀어진 백자편도 수습된바 있으며 드물게 자편(磁片)이외 소성(燒成)받침용의 크고 작은 도지미와 가마벽편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 요지는 서울 근교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려 전.후기 청자요지이면서, 국내 유일의 고려후기 백자가마터로 우리나라 도자사(陶磁史)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경기도 기념물 제124호
  • 소재지 : 동안구 비산동 산3-1 (서울농대 수목원내)
석수동 석실분(石水洞 石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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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三聖山)의 정상(頂上)에서 오른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丘陵)의 정상부에 화강암(花崗岩)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것으로 해발(海拔) 약 300m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분(古墳)은 산의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석실(石實) 내부(內部)는 화강암의 할석(割石)을 이용해 동(東). 서(西). 북벽(北壁)을 면을 맞추어 축조하였고 남벽(南壁)은 대판석(大板石) 1매로 축조하였다. 동.서벽은 5-6단으로 쌓여있고 북벽(北壁)은 크고 작은 돌을6-7단으로 쌓았다. 석실(石室) 내부(內部)의 길이는 3.3m, 폭 1.4m, 높이 1.5m이다. 석실의 뚜껑은 3매의 판석 (板石)을 사용하였으며 커다란 화강암이다. 그 중 가운데의 덮개석이 안으로 도괴 (倒壞)되었고 외부는 흙으로 보강된 점으로 보여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에 남벽을 이용해 추가장(追加葬)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초기 횡혈식석실분으로 연도가 생기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 경기도 기념물 제126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평촌지석묘(坪村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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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평촌 지석묘는 모두 남방식으로 하부구조(지하의 무덤방)는 매우 다양하여 석관식과 석곽실, 다곽실 등이 조사되었다. 1990년 평촌택지개발 사업시 조사, 발굴된 것으로 출토 유물로는 돌화살촉과 민무늬토기 등이 있다. 복원된 지석묘는 모두 5기에 평촌동, 신촌, 귀인마을 등에서 조사된 고인돌이며 안양천을 낀 평촌지역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비지정 기념물
  • 소재지 : 동안구 갈산동 1112
비산동석실분(飛山洞 石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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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산동 석실분은 비산 수도사업소의 서북쪽능선 50m 지점과 정상부 150m지점에 각각 위치한 횡혈식(橫穴式)석실분으로 150m지점에 위치한 석실분은 자연암석을 개석(蓋石)으로 삼아 축조한 것이며 장축방향은 북서43˚에 내부는 자연암반과 할석(割石)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50m지점에 위치한 석실분은 남북장축에 개석은 현실(玄室) 북동쪽으로 일부가 덮혀 있으며 현실 남쪽으론 연도가 개설되었다. 현실에서 연도 쪽으로 50㎝부분엔 폐쇄석이 놓이고 현실의 규모는 남북 220㎝, 동서 170㎝, 최고높이 150㎝이다.


  • 비지정 기념물
  • 소재지 : 동안구 비산동 488
최경환 성지(崔京換 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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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의 본관은 경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이 고향으로 부인 이성례(마리아 1800~1840)와 안양 담배촌에 정착 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파하던 중 천주교가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기해사옥) 1839년 7월 31일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이들은 배교하라는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형벌을 받다가 1839년 9월 최경환은 볼기매를 맞은 후 숨지고 부인 이성례 또한 용산 당고개에서 1840년 1월에 참수되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으로 천묘 후 다시 양화진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담배촌 성역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사의 역사와 신앙적 순교의 아픔을 잘 간직한 곳이다.


  • 비지정 기념물
  • 소재지 : 만안구 안양9동 산79
삼막사 남녀근석(三幕寺 男女根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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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옆에 있는 자연 형태의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에 정성과 기원을 들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토속신앙을 지니고 있다. 속전(俗傳)에는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17년(677)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선바위는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두기를 원하고 출산과 일가(一家)의 번영(繁榮)과 수명장수(壽命長壽)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며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등 이름 있는 날에는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삼색과실(三色果實)등을 차려놓고 빈다. 천연 그대로의 돌인 남근의 높이는 150cm, 여근의 높이는 110c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性器崇拜) 사상(思想)은 수렵(狩獵), 채집(採集)의 풍속과 풍농(豊農), 풍어(豊漁),다산(多産)과 무병장수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巫俗),풍수신앙(風水信仰),동제(洞祭), 미륵신앙(彌勒信仰)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 민속 자료 제3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산10-1
삼막사 명부전(三幕寺 冥府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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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 명부전은 조선 고종 17년(1880)에 건립되었고 1975년에 중수(重修)되었다. 기둥위에 결구(結構)된 공포(拱砲)는 장식적(裝飾的) 요소(要素)가 가미(加味)된 조선말기의 주심포계형식(柱心包系形式)이며 5량가구(五樑架構)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우물천정을 설 치하였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명부(冥府)의 10대왕(大王)을 모신 곳으로 명왕전(冥王殿)이라고도 한다.


  • 문화재 자료 제60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41-54
퇴도서첩(退陶書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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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도서첩은 퇴계(退溪)이황(李滉)이 제자인 권호문(權好文)에게 글씨를 가르치기 위하여 체본으로 써 준 것으로 크고 작은 글씨와 해(楷)·행(行)·초(草)의 서체를 구별하여 썼다. 퇴계의 글씨는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여장자애지서병(與長子受之書屛)과 같은 대작(大作)도 남아 있다. 그러나 퇴도서첩은 다양한 서체에 체본으로 사용된 작품으로 성의를 다하여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21장이며 맨 뒷장에 낙인구서첩(洛人求書帖)이란 제하(題下)에 당시(唐詩) 9행이 있으나 이것은 퇴계의 글씨가 아닌듯하다. 이외에 퇴계선생유첩은 2책(冊)의 장첩(裝帖)으로 모두 퇴계가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 보물 제548호
  • 소재지 : 동안구 신촌동 (개인소장)
안양사 부도(安養寺 浮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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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 부도는 탑신(塔身)과 기단(基壇) 중석(中石)은 없으며 하대석(下臺石)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地臺石)으로 복연(複蓮)을 장식하였고 상대석(上臺石)은 앙연(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3단의 옥개 받침위에 올려있고 처마의 상, 하선이 전각(轉角)부분에서 반전(反轉)하며 높이는 1.36m, 너비1.35m로 양식의 특징을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 되어진다 부도란 고대 인도의 범어(buddh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처, 불신을 뜻하며 불가에서 열반후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곳이다.


  • 비지정유형문화재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27
구) 서이면사무소(舊 西二面事務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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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이면사무소는 1914년에 지금의 호계도서관 부근에 신축 후 1917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1949년까지 32년간 면사무소로 활용되었다. 옮길 당시 행랑채는 주변 가옥에서 헐어다가 연 결하여 지었다고 한다. 당시 면사무소는 부지 약 320평에 건물은 ㄱ자 한옥으로 약 31평이며 부속 건물로 농기와 씨앗종자를 보관하는 15평의 창고, 누에고치 수매와 회의실을 겸한 약 40평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이후 1949년 개인에게 매각되어 삼성의원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한식당으로 사용되 엇으나 2000년에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하였다. 한옥건축인 이 건물은 20세기 초반의 치목 및 가구 기법과 의장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 문화재자료 제100호
  • 소재지 : 만안구 안양1동 674-271
삼막사(三幕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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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사(三幕寺)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신라 문무왕(文武王) 17년(677)에 원효, 의상, 윤필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며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삼막사로 부르다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년) 나옹(懶翁)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이곳으로 오니 선풍(禪風)이 크게 일었고 조선조 무학(無學)대사에 의하여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사찰로 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태종(太宗)때 대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시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렀으나 법당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다. 현재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60호)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과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등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 전통사찰 제9호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241-54
염불암(念佛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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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암(念佛庵)이 위치한 삼성산(三聖山)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어 그 하나는 원효, 의상, 윤필거사 세 분이 이 산에 들어와 원효대사는 삼막사(三幕寺)를 의상대사는 연주암(戀主庵)을 윤필거사는 염불암을 각각 짓고 수도하였다는데서 기인하고 또 하나는 삼막사에 지공, 나옹, 무학 세 분이 주석했던 까닭에 삼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염불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유래도 있으며 이 때 이름은 안흥사(安興寺)로 곧 염불암의 시초로 전해진다. 조선 태종7년(1407년)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을 누루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대중창했고 이후 계속된 중수를 하여 조선후기 철종때에 이르러 도인스님의 칠성각(七星閣) 건립과 1992년 청봉스님에 의해 요사체(療舍體)와 대웅전(大雄殿)이 완공되며 그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 뒤편에 위치한 높이 8m의 미륵불은 전해오는 말에 1947년 성공 기석(奇石)화상(和尙)이 주지로 부임하여 낡고 퇴락한 전각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불사(佛事)를 준비하던 중에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마애불상을 새겨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는 현몽을 받들어 1964년부터 5년의 불사끝에 완공된 것이다. 사찰 선방 주변에 있는 조선시대 부도중 마애부도(磨崖浮屠) 2점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경내에 서있는 500년의 보리수(도지정 보호수 5-2)는 염불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 전통사찰 제79호
  • 소재지 : 석수동 241-52
안양사(安養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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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 안양사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주하는 청정(淸淨)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八角圓堂)의 부도(浮屠)와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있다. 귀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중 안양사에 들렸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한 여러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전통사찰 제10호
  • 소재지 : 석수동 산27, 28
망해암(望海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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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암(望海庵)은 봉은사말사지(奉恩寺末寺誌)에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영조때 신경준(申景濬)이 지은 가람고(伽覽考)에도 기록이 되어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 순조 3년(1803)에 정조대왕의 모친인 홍대비(洪大妃)께서 중건(重建)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세종대왕 재위시 삼남지방(山南地方)에서 한성(漢城)으로 여러 척의 곡물선이 인천 팔미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뒤집힐 지경에 돌연 뱃머리에 스님 한 분이 나타나 배를 안정시키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선원 일행이 스님의 거처를 물으니 관악산 망해암이라 답변하였고 그 후 망해암을 찾은 선원이 법당에 모셔진 불상이 법당에 모셔진 불상이 스님과 용모가 닮음을 알고 놀랐으며 이를 아신 대왕께서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망해암의 중심건물인 용화전에는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조성된 석조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보개(寶蓋)를 쓰고 도톰한 코와 입, 길게 늘어진 귓볼에 법의(法依)는 통견(通肩)이며 굵은 U자형의 옷자락선이 조밀하게 표현 되어있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상호(相好)등은 당시의 불교신앙과 대불조성(大佛造成)에 의한 시대적 유형을 살피는 자료로 평가된다.


  • 전통사찰 제78호
  • 소재지 : 동안구 비산동 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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